밀라노 칙령은 313년 로마 제국의 서방 정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동방 정제 리키니우스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만나 공동으로 발표한 포고령이다. 이 칙령의 핵심은 로마 제국 내에서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기독교는 오랜 박해의 역사에서 벗어나 법적으로 공인된 종교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는 서구 역사에서 종교적 관용을 명문화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이 칙령이 나오기 전까지 로마 제국 내 기독교인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를 비롯해 여러 차례 조직적이고 극심한 박해를 겪었다. 311년 갈레리우스 황제가 임종 직전 '관용 칙령'을 발표하며 박해를 중단시킨 바 있으나, 밀라노 칙령은 이를 더욱 구체화하고 제국 전역으로 확산시킨 조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기독교의 영향력을 정치적 통합의 도구로 인식하였고, 리키니우스와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이 포고령을 성사시켰다.
밀라노 칙령의 주요 내용은 단순히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권리 회복을 포함하였다. 과거 국가나 개인에 의해 몰수되었던 기독교 교회의 재산과 예배당 부지 등을 아무런 비용이나 보상 요구 없이 즉각 반환할 것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실질적인 복구 조치는 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회복하고 로마의 제도권 내로 안정적으로 편입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적 의의 측면에서 밀라노 칙령은 로마 제국이 다신교 중심의 사회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로 이행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비록 이 칙령이 기독교를 제국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독교가 제국 내 주류 종교로 성장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또한 국가 권력이 개인의 신앙 문제에 관용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원칙을 천명함으로써 종교와 국가의 관계 설정에 있어 새로운 선례를 남겼다.
하지만 밀라노 칙령 이후에도 로마 내의 종교적 갈등이나 권력 투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포고령 발표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관계가 악화하면서 동방 지역에서는 일시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압박이 재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을 단독 통치하게 되면서 칙령의 정신은 더욱 공고해졌으며, 이는 훗날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승격되는 과정의 중요한 역사적 전초 단계가 되었다.